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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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생애
- 2.1. 출생 (1769년)
- 2.2. 학업 (1781년-1787년)
- 2.3. 초기 군 경력 (1787년-1793년)
- 2.4. 프랑스 혁명 전쟁 참전 (1794년-1795년)
- 2.5. 인도 정복 전쟁 (1796년-1805년)
- 2.6. 귀국 및 정계 진출 (1805년-1808년)
- 2.7.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년-1814년)
- 2.8. 나폴레옹의 첫 번째 실각에서 복권까지 (1813년-1815년)
- 2.9. 워털루 전투 (1815년)
- 2.10. 프랑스 점령군 총사령관 (1815년-1818년)
- 2.11. 리버풀 백작 내각 병기청 장관 (1818년-1827년)
- 2.12. 총리 재임 (1828년-1830년, 1834년)
- 2.13.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와 침실 시녀 사건 (1837년-1839년)
- 2.14. 만년 (1839년-1852년)
- 2.15. 사망 (1852년)
- 3. 서훈
- 4. 평가
- 참조
1. 개요
아서 웰즐리(1769-1852)는 제1대 웰링턴 공작으로,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1799년 마이소르 총독을 시작으로 마라타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며 명성을 얻었다. 살라망카 전투 승리로 웰링턴 후작이 되었고, 비토리아 전투 승리로 원수로 진급했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하며 영국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후 프랑스 점령군 사령관, 병기 총감, 총리를 역임했으며, 가톨릭 해방령을 통과시키는 데 기여했다. 만년에는 육군 총사령관을 지냈으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검소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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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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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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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서 웨슬리 |
출생일 | 1769년 5월 1일 |
출생지 | 아일랜드 왕국 더블린 |
사망일 | 1852년 9월 14일 |
사망지 | 잉글랜드 켄트주 웰머 |
안장 장소 | 세인트 폴 대성당 |
국적 | 영국 |
별칭 | 웨슬리 경 |
충성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영국 |
서명 | 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Signature.svg |
경력 | |
군사 경력 | 1787년–1852년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주요 참전 | 프랑스 혁명 전쟁 제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 코티오테 전쟁 돈디아 와그 반란 (1800) 제2차 앵글로-마라타 전쟁 나폴레옹 전쟁 백일천하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토리당 (1834년까지) 보수당 (1834년부터) |
총리 임기 | 1828년 1월 22일 – 1830년 11월 16일 1834년 11월 17일 – 1834년 12월 9일 |
외무부 장관 임기 | 1834년 11월 14일 – 1835년 4월 18일 |
내무부 장관 임기 | 1834년 11월 17일 – 1834년 12월 15일 |
보급청 장관 임기 | 1819년 - 1827년 |
아일랜드 담당 장관 임기 | 1807년 - 1809년 |
하원 의원 | 라이 (1806년 4월 1일 – 1806년 11월 4일) 미첼 (1807년 1월 15일 – 1807년 5월 12일, 1807년 5월 21일) 트랄리 (1807년 7월 27일) |
귀족원 의원 임기 | 1809년 9월 4일 – 1852년 9월 14일 |
개인 정보 | |
부모 | 아버지: 제1대 모닝턴 백작 개럿 웨슬리, 어머니: 앤 힐-트레버 |
배우자 | 캐서린 패크넘 (1806년 결혼, 1831년 사망) |
자녀 | 제2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웨슬리 찰스 웨슬리 경 |
훈장 | |
훈장 | 가터 훈장 바스 훈장 로열 겔프 훈장 왕립 검 훈장 황금 양모 기사단 군사 빌헬름 훈장 |
2. 생애
1796년 마이소르 전쟁에서 공을 세워 1799년 마이소르 총독이 되었고, 이후 마라타 전쟁에서도 활약했다. 웰링턴은 이때부터 보급과 대민관계에 중점을 두는 전략을 보였다.[74][54]
1804년 소 피트 내각이 성립되자, 육군상 캐슬레이 자작의 후원으로 하노버 원정대 지휘관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1808년 포르투갈에서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웰링턴은 원정대 지휘관으로 복귀했다.
그 해 8월 21일 영국군 원정대는 비메이로 전투에서 프랑스 쥐노 장군의 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곧이어 쥐노 부대 포로들의 송환에 합의하는 신트라 협정이 맺어져 영국군은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하기 어려워졌고, 웰링턴의 부대는 본국으로 복귀했다.
1809년, 웰링턴은 내각을 설득하여 포르투갈 재원정을 허가받았다. 리스본에 상륙한 영국군 원정대는 술트 원수의 부대를 급습하여 포르투갈을 해방시키고 에스파냐로 진격했다. 7월 27일, 탈라베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으나, 마드리드 함락에는 실패했다. 공성을 풀고 포르투갈로 후퇴하던 웰링턴은 부사코 전투에서 마세나 원수의 부대를 물리쳤다.
리스본에서 토레스베드라스 요새선을 구축하고 농성하던 웰링턴 부대에 대해 프랑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마세나는 1811년 봄, 포르투갈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1812년 반격에 나선 웰링턴은 7월 22일 살라망카 전투에서 프랑스군 4만 명을 40분 만에 격파하고, 8월 12일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로 이베리아 반도의 프랑스군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도망쳤다.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캐슬레이는 다시 대프랑스 동맹 형성을 주도했고, 이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왔다. 웰링턴은 공작으로 승작되었고, 50만파운드의 포상금도 받았다.[1]
빈 회의에 영국 사절단 대표로 참가한 웰링턴은 회의 도중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복귀하자, 군을 지휘하기 위해 빈을 떠났다.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은 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와 협력하여 영국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웰링턴은 로버트 필과 함께 토리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1828년 총리가 되었다.
총리 재임 중 가톨릭교도 해방령 논의가 있었는데, 대니얼 오코넬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가톨릭 차별법으로 의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 계기였다. 웰링턴은 토리당 소속이었음에도 가톨릭 해방령을 옹호하여 당내 반대를 샀고, 휘그당의 지지로 가톨릭 해방령을 통과시켰다. 조지 4세가 이를 거부하려 하자 총리직 사임으로 맞섰으나, 국내 곳곳에서 반발이 터져 나와 1830년 그레이 백작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
2. 1. 출생 (1769년)
1769년 아일랜드 귀족 초대 모닝턴 백작 개럿 웨즐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52][53] 어머니는 초대 던캐논 자작 아서 힐-트레버의 딸 앤이었다.[54]생일과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769년 4월 29일 아일랜드 왕국 수도 더블린의 어퍼 메리언 스트리트 24번지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맏형은 웰즐리 자작의 의례 칭호를 가진 리처드 (후의 제2대 모닝턴 백작·초대 웰즐리 후작)였고, 둘째 형은 William Wellesley-Pole, 3rd Earl of Mornington|윌리엄 웰즐리-폴|label=윌리엄영어 (후의 제3대 모닝턴 백작)이었다. 또한, 후에 남동생으로 Henry Wellesley, 1st Baron Cowley|헨리 웰즐리|label=헨리영어 (후의 초대 Baron Cowley|카울리 남작|label=카울리 남작영어), 여동생으로 Lady Anne Smith|레이디 앤 스미스|label=앤영어 (후의 Charles Culling Smith|찰스 컬링 스미스|label=찰스 컬링 스미스영어 부인)가 태어났다.
2. 2. 학업 (1781년-1787년)
1781년에 명문 퍼블릭 스쿨인 이튼 칼리지에 입학했다. 성적은 평범했지만, 혈기 왕성한 학생으로 이름을 떨치며 자주 싸움을 했다. 훗날 아서는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튼 칼리지 운동장 덕분"이라고 회고했다.[55]아버지 모닝턴 백작이 사망하여 학비 지불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어머니 앤의 지시로 이튼 칼리지를 자퇴하고 오스트리아 령 브뤼셀로 이주하여 1786년부터 승마 학교에 다녔다.[54][53] 그 후, 프랑스 앙제의 피니롤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54] 프랑스어를 습득했다.[54][53]
2. 3. 초기 군 경력 (1787년-1793년)


웰즐리는 1787년 3월 7일, 18세의 나이로 제73 보병 연대에 소위로 임관하였다.[9] 같은 해 10월, 형의 도움으로 새로운 아일랜드 총독 버킹엄 경의 부관으로 하루 10 실링 (소위 급여의 두 배)을 받으며 배정되었다.[10] 그는 아일랜드에서 창설된 새로운 제76 보병 연대로 전출되었으며, 1787년 크리스마스 날에 중위로 진급했다.[10] 더블린에서 복무하는 동안 그의 임무는 주로 사교적인 것이었다.
1788년 1월 23일, 제41 보병 연대로 전출되었고,[11] 1789년 6월 25일에는 제12 (웨일스 공) 기병 연대로 전출되었다.[12] 1790년 트림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 지명되어 정식으로 선출되었다.[52] 1791년 1월 30일, 대위가 되었고 제58 보병 연대로 전출되었다.[13] 1791년 10월 31일, 제18 기병 연대로 전출되었다.[14]
1793년, 키티 파케넘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1793년 제33연대에서 매입으로 소령이 되었다.[15] 같은 해 9월, 형에게 빌린 돈으로 제33연대에서 중령을 구매했다.[16]
다음은 웰즐리의 초기 군 경력을 요약한 표이다.
날짜 | 계급 | 연대 | 비고 |
---|---|---|---|
1787년 3월 7일 | 소위 | 제73 보병 연대 | |
1787년 12월 25일 | 중위 | 제76 보병 연대 | |
1788년 1월 23일 | 중위 | 제41 보병 연대 | [57] |
1789년 6월 25일 | 중위 | 제12 경룡기병 연대 | [58] |
1791년 1월 30일 | 대위 | 제58 보병 연대 | [59] |
1791년 10월 31일 | 대위 | 제18 기병 연대 | [60] |
1793년 4월 30일 | 소령 | 제33 보병 연대 | 매입 |
1793년 9월 | 중령 | 제33 보병 연대 | 매입 |
2. 4. 프랑스 혁명 전쟁 참전 (1794년-1795년)

1792년부터 프랑스 혁명에 대한 왕정 열강들의 간섭을 이유로 프랑스 혁명 정부는 프랑스 혁명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 혁명군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퇴하고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네덜란드와 라인란트를 제압했다.[65] 1793년 2월에는 벨기에 병합을 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를 했다.[66]
조지 3세의 차남 요크 공작 프레데릭이 이끄는 영국군이 벨기에의 플랑드르에 파견되었다. 1794년 6월, 웰즐리는 제33 연대를 이끌고 코크 항을 출발하여 오스텐드로 향했는데, 이는 플랑드르 주둔군을 위한 증원 병력의 일부였다. 그들은 참전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요크 공작이 네덜란드로 후퇴하는 과정에 합류했다. 아서가 이끄는 제33보병 연대도 1794년 6월부터 플랑드르로 가서 요크 공작의 군에 합류했다.[67]
1794년 9월 15일, 브레다 동쪽에 위치한 보크스텔 전투에서, 웰즐리는 임시로 여단을 지휘하며 첫 전투 경험을 했다. 랄프 애버크롬비 장군이 우세한 프랑스군에 맞서 철수하는 동안, 제33 연대는 적 기병대를 막아내며 인접 부대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했다. 혹독한 겨울 동안 웰즐리와 그의 연대는 발 강을 따라 방어선을 지키는 연합군의 일부를 이루었다. 제33 연대는 다른 병력들과 마찬가지로 소모와 질병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웰즐리의 건강 역시 습한 환경에 의해 악화되었다.
이 전투는 영국군의 참패로 끝났지만, 혼란 상태의 철수전 중에서도 아서의 제33보병 연대는 높은 규율을 유지했다고 한다. 9월 15일 보크스텔에서 요크 공작의 군이 프랑스 혁명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제33보병 연대는 프랑스군에게 일제 사격을 계속하여 프랑스 혁명군의 전진을 늦추고, 아군의 철수를 도왔다.[68]
아서에게 있어서는 이 전쟁이 첫 실전 경험이 되었다.[54][69][70]
이 전역은 재앙으로 끝나 영국군이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에서 독일 국가들로 몰려났지만, 웰즐리는 진격하는 대열에 대한 보병의 대열 사용과 해상력 지원의 장점 등 전투 전술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그는 이 전역의 실패가 지도자들의 과오와 본부의 열악한 조직력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나중에 네덜란드에서의 시간을 회상하며 "적어도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웠고, 그것은 항상 귀중한 교훈이 된다"라고 말했다.[71]
1795년 4월에 영국으로 귀국했다.
2. 5. 인도 정복 전쟁 (1796년-1805년)
1796년 마이소르 전쟁에서 공을 세워 1799년 마이소르 총독이 되었고, 이후 마라타 전쟁에서도 활약했다. 이 시기부터 웰즐리는 보급과 대민관계에 중점을 두는 전략적 특징을 보였다.[74][54]
1796년 5월 대령으로 진급한 아서는, 6월에 제33보병연대와 함께 영국 동인도 회사가 통치하는 인도에 파견되었다.[52][75][72] 그는 인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는데,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지인은 힌두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품성이 전혀 없고, 따뜻함이 없으며, 용서 없는 잔혹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 엄청난 숫자를 이용하여 유럽인을 습격하고 살해한다"고 썼다.[76]
1798년 5월, 그의 형 모닝턴 백작(1799년에 웰즐리 후작으로 서임)이 인도 총독으로 부임해 왔다.[52] 동생 헨리도 형의 비서로 동행하여, 웰즐리 가문 형제 3명이 인도의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들은 긴밀히 협력하며 인도 통치를 수행했다.[77]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에서는 프랑스와 동맹한 인도 남부 마이소르 왕국의 군주 티푸 술탄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었다.[78] 이에 형 모닝턴 백작은 정복 전쟁을 계획했다.[79] 아서는 불필요한 영토 확장에 소극적이었으나, 형의 결정에 따라 군인으로서 활약하게 된다.[52]
영국 해군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활약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은 실패했고,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마이소르 왕국에 원군을 보낼 가능성이 사라졌다.[81] 형 모닝턴 백작은 1799년 2월, 영국 동인도 회사군에게 마이소르 침공을 명령했다(제4차 마이소르 전쟁).[82]
아서가 이끄는 제33보병연대는 세링가파탐 요새 공격에 참여했다. 첫 공격은 야간에 이루어졌는데, 정찰 부족으로 인해 요새 인근 숲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퇴각해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아서는 낮에 충분한 정찰을 하는 중요성을 깨달았다.[83]
5월의 재공격에서는 데이비드 베어드의 지휘 아래 숲을 통과하여 총공격을 감행, 세링가파탐 요새를 함락하고 티푸를 전사시켰다.[84]
전후, 아서는 세링가파탐 요새 총독으로 임명되어 마이소르 전역을 통치했다.[85] 그는 "공정, 부패 억제, 정직, 약속 실행"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아 법률 정비, 질서 유지, 식산흥업에 힘썼다. 또한 현지 제후들의 권위를 보장하고 마이소르 국민의 고용 창출에도 노력했다.[86]
한편, 마라타족 도적단 수령 돈디아 워의 약탈이 격화되었다. 워는 세링가파탐 함락 시 탈출하여 도적단을 조직,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87]
아서는 1799년 8월 도적단 토벌에 나섰다.[54] 워의 본거지 치텔드로그를 함락했지만, 워는 도주했다. 1800년 4월, 워가 다시 도적단을 조직하자 아서는 재차 출진, 9월까지 인도 반도 끝까지 추격하여 워를 사살했다.[88]
1802년 4월 29일, 아서는 소장으로 승진했다.[89][54][52]
2. 6. 귀국 및 정계 진출 (1805년-1808년)
1804년 소 피트 내각이 성립한 후, 육군상 캐슬레이 자작의 후원으로 하노버 원정대의 지휘관으로 내정되었으나,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하면서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마땅히 맡을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1]2. 7.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년-1814년)
1799년 마이소르 총독을 지낸 후 마라타 전쟁에서 공을 세운 웰링턴은 1804년 소 피트 내각의 육군상 캐슬레이 자작의 후원으로 하노버 원정대 지휘관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고, 1808년 포르투갈에서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원정대 지휘관으로 복귀했다.이후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다.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4만 명의 프랑스군을 40분 만에 격파하고, 1813년 비토리아 전투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프랑스군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이러한 웰링턴의 활약으로 캐슬레이는 다시 대프랑스 동맹 형성을 주도했으며, 이는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웰링턴은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으로 승작되었고, 50만파운드의 포상금도 받았다.[1]
2. 7. 1. 프랑스군의 이베리아 반도 자진 철수 (1808년)
1808년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서 반도 전쟁이 발발하자, 나폴레옹에 저항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민중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군을 이끌고 포르투갈에 상륙했다.[98] 그 해 8월 21일 영국군 원정대는 비메이로 전투에서 프랑스 쥐노 장군의 부대를 격파했다.[98] 그러나 곧이어 쥐노 부대 포로들의 송환에 합의하는 신트라 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영국군은 더 이상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하기 힘들어졌고, 웰링턴의 부대는 본국으로 복귀했다.[98]2. 7. 2. 프랑스군의 포르투갈 재침공 격퇴 (1808년-1811년)
1809년, 웰링턴은 영국 내각을 설득하여 포르투갈로 다시 원정을 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리스본에 상륙한 영국군 원정대는 포르투갈 주둔군 사령관 술트 원수의 부대를 급습하여 포르투갈을 해방시키고 에스파냐로 진격했다. 에스파냐 반란군과 연합한 웰링턴의 부대는 7월 27일, 탈라베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으나, 마드리드를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했다.[52] 이 승리로 웰링턴은 '탈라베라 자작 웰링턴'이라는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되었다.공성을 풀고 포르투갈로 후퇴하던 웰링턴은 부사코 전투에서 자신을 추격해 오던 마세나 원수의 프랑스군 부대를 물리쳤다.[52]
웰링턴의 부대는 리스본에서 토레스베드라스 요새선을 구축하여 농성하였고, 프랑스군은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마세나는 1811년 봄, 포르투갈을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52]
2. 7. 3. 스페인-포르투갈 국경 쟁탈전 (1811년-1812년)
1811년 봄, 마세나 원수는 포르투갈에서 철수하였다. 웰링턴은 병력을 보충하여 반격에 나섰고, 1812년 7월 22일 살라망카 전투에서 프랑스군 4만 명을 40분 만에 격멸하는 대승을 거두고, 8월 12일 마드리드에 입성했다.2. 7. 4. 스페인 진격 (1812년-1813년)
1812년영어 병력을 보충하여 반격에 나선 웰링턴은 그해 7월 22일 살라망카 전투에서 4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군을 40분 만에 격멸하는 대승리를 거두고, 8월 12일 마침내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에서 이베리아반도의 프랑스군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모두 피레네산맥을 넘어 도망쳤다.[1]2. 7. 5. 스페인 재진격 (1813년)
1812년 병력을 보충하여 반격에 나선 웰링턴은 그 해 7월 22일 살라망카 전투에서 4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군을 40분 만에 격멸하는 대승리를 거두고, 8월 12일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에서 이베리아반도 주둔 프랑스군을 완전히 궤멸시켰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모두 피레네산맥을 넘어 도망쳤다.[1]캐슬레이는 프랑스의 배후였던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함으로써 다시 대프랑스 동맹 형성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이 동맹은 나폴레옹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웰링턴은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으로 승작되었고, 50만파운드의 포상금도 받았다.[1]
2. 8. 나폴레옹의 첫 번째 실각에서 복권까지 (1813년-1815년)
1813년 10월, 웰링턴은 스페인-프랑스 국경의 비다소아 강을 확보하고 11월부터 프랑스 침공을 시작했다.[169] 바욘을 포위하려 했지만, 술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툴루즈로 철수했다.[170][171] 웰링턴은 보르도를 점령하고, 툴루즈로 진군했다.[172]1814년 3월 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연합군도 동쪽에서 프랑스 침공을 시작하여 알렉산드르 1세가 이끄는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했다.[173] 연합군 점령 하에 탈레랑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고, 4월 2일 원로원은 나폴레옹의 폐위를 결정했다. 퐁텐블로에 머물던 나폴레옹도 4월 4일 퇴위를 받아들였다.[174][175]

4월 10일, 웰링턴의 군대는 툴루즈를 함락했다. 다음 날인 11일, 나폴레옹 측과 동맹국 측의 협상으로 나폴레옹의 무조건 퇴위가 정식 결정되었고, 12일 웰링턴에게도 그 정보가 전해졌다.[176] 웰링턴은 이 소식에 "좋은 시기다"라고 말하며 기뻐했고,[177] 같은 날 술트 원수와 현지 휴전 협정을 맺었다.[178]
웰링턴은 전공을 인정받아 5월 3일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으로 서임되었다.[179][174] 1814년 6월 영국으로 귀국했으나, 곧바로 주프랑스 영국 대사로 임명되어 파리에 파견되었다.[183][184]
1814년 말부터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를 의장으로 하는 빈 회의가 개최되었고, 웰링턴 공작도 참가했다.[186] 1815년 2월, 영국 대표 외상 캐슬레이 자작이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웰링턴 공작이 영국 대표 대리가 되었다.[187]
2. 9. 워털루 전투 (1815년)
워털루 전투( Bataille de Waterloo프랑스어 )에서 웰링턴은 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와 협력하여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가 된 이 전투에서 영국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1]2. 10. 프랑스 점령군 총사령관 (1815년-1818년)
Field Marshal영어 웰링턴 공작은 나폴레옹 전쟁 종전 후, 빈 회의에서 영국 사절단을 대표했던 캐슬레이 자작과 함께 프랑스 주둔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았다.[1] 그는 패전국 프랑스에 대해 관대한 점령 통치를 시행했고, 1818년 점령군 철수가 완료된 후 영국으로 귀국했다.2. 11. 리버풀 백작 내각 병기청 장관 (1818년-1827년)
리버풀 백작 내각에서 1818년 12월 26일 웰링턴은 병기 총감으로 임명되어 정치에 참여했다.[31] 1819년 10월 9일에는 플리머스 총독이 되었다.[32] 1827년 1월 22일 영국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고,[33] 2월 5일에는 런던 탑 경비대장이 되었다.[34]당시 영국 육군 관리 기구는 복잡했는데, 보급청은 육군 무기, 탄약, 군용 코트 보급을 담당했다(식량과 수송은 재무부 관할).[241] 웰링턴은 1827년까지 장관직을 역임했지만, 특별한 업적은 없었다.[242]
1822년 8월 외무대신 캐슬레이 자작이 자살하고, 조지 캐닝이 후임이 되었다. 웰링턴은 조지 4세에게 캐닝을 추천했다.[243] 캐닝은 토리당 내 자유주의파였고,[244] 보수적인 웰링턴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반정부파에 대항하기 위해 그의 입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243]
하지만 캐닝의 입각으로 내각 내 균열은 깊어졌다. 웰링턴과 대법관의 보수적 견해는 캐닝과 윌리엄 허스키슨의 자유주의적 견해와 자주 충돌했다. 서 로버트 필 준남작, 배서스트 백작은 중간적 입장을 취했다.[245][246]
가톨릭 해방 문제에서 대립이 심화되었다.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에게만 공무 취임이 허용된 상황에서 가톨릭의 공무 취임을 인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캐닝과 허스키슨은 가톨릭 해방을 지지했고, 필은 반대했다. 웰링턴도 반대했지만, 내각 분열을 우려해 이 문제에서 배서스트 백작과 함께 내각 융화에 힘썼다.[245]
1827년 1월 요크-올버니 공작이 서거하자, 웰링턴은 보급청 장관 재임 중 육군 최고 사령관을 겸임했다.[247] 그는 이 지위에 오른 것을 매우 기뻐했다.[248]
1827년 2월 17일 리버풀 백작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후임 총리를 결정해야 했다. 웰링턴은 총리가 될 의사가 없었고, 조지 4세에게 "캐닝이나 필에게 대명을 내리는 것이 좋지만, 총리 선정은 폐하께서 수행해야 할 책무입니다"라고 답했다.[249]
캐닝과 필은 서로의 내각에서 각료가 되는 것을 거부했고, 국왕은 캐닝에게 조각의 대명을 내렸다.[250]
필을 비롯한 가톨릭 해방 반대파 각료들은 사임했다. 웰링턴은 캐닝의 설득에도 "가톨릭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는 리버풀 내각의 방침을 귀관이 따를 경우 남을 수도 있지만, 귀관에게 그럴 의사가 없음은 명백하다. 당을 분열시킬 우려가 있는 내각에는 참여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입각을 거부하고, 보급청 장관직과 육군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251][248]
2. 12. 총리 재임 (1828년-1830년, 1834년)
1828년 토리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웰링턴은 총리직을 수락하고 가톨릭교도 해방령 논의를 이끌었다. 대니얼 오코넬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가톨릭 차별법으로 인해 의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웰링턴은 가톨릭 해방령을 옹호하며 당내 반대를 무릅쓰고 휘그당의 지지를 얻어 법안을 통과시켰다.[263] 조지 4세가 이를 거부하려 하자 총리직 사임으로 맞섰으나, 국내 곳곳에서 반발이 터져 나오면서 결국 보수 정책을 고수하다 1830년 그레이 백작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267]1834년 토리당이 정권을 되찾았을 때, 웰링턴은 하원 의원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여 총리직을 거절하고, 이탈리아에 있던 로버트 필이 총리가 될 때까지 3주 동안 임시 지도자 역할을 하며 총리직과 대부분의 다른 부처의 책임을 맡았다.[275]
2. 12. 1. 수상 취임까지의 경위 (1827년-1828년)
조지 캐닝의 급사 후, 고드리치 자작이 이끄는 내각과 국왕 조지 4세의 대립으로 1828년에 웰링턴 공작에게 조각의 대명이 내려졌다.[253][256][257]웰링턴 공작은 조지 캐닝 내각에 참여했던 휘그당의 랜즈다운 후작 파에게 입각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웰링턴 공작의 반 가톨릭 해방 입장에 반대하여 거절했다. 이후 윌리엄 허스키슨이 이끄는 캐닝 파(토리당 내 자유주의파·가톨릭 해방파)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이들은 가톨릭 해방 문제를 보류하는 조건으로 입각을 승낙하여 조각의 전망이 열렸다.[258] 한편 웰링턴 공작은 고드리치 자작 내각에는 입각하지 않았지만, 육군 총사령관직 복귀는 승낙했다.[254]
2. 12. 2. 제1차 웰링턴 공작 내각 (1828년-1830년)
1828년 1월 20일에 대권을 받아 22일에 제1차 웰링턴 공작 내각을 발족시켰다.[259] 이 때 육군 총사령관 직을 사임했다.[260]웰링턴 공작의 내각에는 허스키슨, 펄머스턴 자작, 멜버른 자작 등 캐닝파 각료가 많이 참여했지만, 부패 선거구 삭감 문제로 내무 장관 로버트 필과 대립하여 5월부터 6월에 걸쳐 일제히 사임했다.[261] 이 때문에 웰링턴 공작 내각은 조기에 정권 기반이 불안정해졌다.
1828년 7월, 아일랜드 독립을 목표로 하는 아일랜드 가톨릭 대니얼 오코넬이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국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의사당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가톨릭 해방의 기운이 높아졌다.[262] 웰링턴은 가톨릭에 대한 양보를 생각하게 되었고, 1829년 3월에 가톨릭교도 해방령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4월에 가결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해방에 반대하는 울트라 토리가 사실상 토리당에서 이탈해 버렸고, 웰링턴 공작의 정치 기반은 약화되었다.[263]
선거법 개정 기운이 높아지자, 휘그당 젊은 의원 존 러셀 경이 부패 선거구 폐지와 대도시 의석 증설을 내용으로 하는 선거법 개정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가까스로 법안을 부결시켰지만, 오히려 휘그당의 반정부 단결력은 강해졌다.[264]
1830년 6월 26일 조지 4세가 붕어하고 그의 동생 윌리엄 4세가 즉위했다.[265] 1830년 영국 총선 결과, 토리당 250석, 야당(휘그, 캐닝파, 울트라 토리) 196석, 무소속·소속 불명 212석이었다. 웰링턴 공작이 "선거법 개정은 하지 않겠다"라고 의회에서 명언함으로써, 정부 타도 기운은 최고조에 달했다.[266]
11월 15일, 정부 제출 왕실비 법안 반대 휘그당 동의안이 233 대 204로 가결되어 웰링턴 공작은 총사퇴했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토리당 정권이 무너지고 그레이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휘그당 정권이 탄생했다.[267]
2. 12. 3. 야당 당수로서 (1830년-1834년)
1830년 웰링턴 내각이 붕괴되었다. 그해 여름과 가을, 스윙 폭동이 전국을 휩쓸었다.[268] 휘그당은 1770년대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집권하지 못했고, 사회 불안에 대한 대응책으로 정치 개혁을 통해 재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웰링턴은 개혁 반대 및 선거권 확대 반대라는 토리당의 정책을 고수했고, 그 결과 1830년 11월 15일 불신임 투표에서 패배했다.[268]휘그당은 최초의 개혁법안을 제출했고, 웰링턴과 토리당은 이 법안의 통과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휘그당은 이 법안을 영국 하원에서 두 번째 심의를 통과시키지 못했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선거가 치러졌고, 휘그당은 압도적인 다수로 승리했다. 두 번째 개혁법이 제출되어 하원에서 통과되었지만, 토리당이 장악한 귀족원에서는 부결되었다. 또 한 번의 준 반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웰링턴의 자택인 앱슬리 하우스는 1831년 4월 27일과 10월 12일, 시위대의 표적이 되어 창문이 부서졌다.[268] 그가 강력히 반대했던 개혁법안의 부결에 분노한 군중들로 인한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1832년 6월에 쇠창살이 설치되었다.[268] 1832년 휘그당 정부가 붕괴되었고, 웰링턴은 부분적으로 잉글랜드 은행에 대한 뱅크런으로 인해 토리당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국왕 윌리엄 4세는 그레이 백작을 다시 수상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국왕이 귀족원을 휘그당 신규 귀족으로 채우겠다고 위협한 후에야 법안은 귀족원을 통과했다. 웰링턴은 이 변화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는데, 확대된 선거구에 따른 첫 번째 선거 이후 의회가 처음 소집되었을 때 웰링턴은 "내 평생 그렇게 엉망인 모자를 많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68]
웰링턴은 유대인 시민권 차별 철폐 법안에 반대했고, 1833년 8월 1일 의회에서 영국은 "기독교 국가이자 기독교 입법부이며, 이 법안은 그러한 특성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법안은 104 대 54표로 부결되었다.[268]

이후 웰링턴 공작은 1834년까지 야당으로서 토리당을 지도했지만, 이때부터 당의 실무를 하원 토리당의 지도자 로버트 필 준남작에게 위임하게 되었다[268]。 다만 자유주의적인 필은 당내에 적이 많았기에, 당분간 웰링턴 공작이 당수로서 위세를 떨칠 필요가 있었다. 또한 필에게 실무를 위임하게 되었지만, 종종 정치에 대한 의욕을 되찾아 귀족원에서 토리당을 지도하며 필의 당 지도에 제약을 가했다[271]。
개혁에 불타는 그레이 백작 정권은 먼저 선거법 개정을 목표로 했지만,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토리당은 그 반대 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1831년 의 휘그당의 압승으로 선거법 개정의 대세를 뒤집기 어렵게 되어도, 귀족원에서 법안을 수정하여 무력화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269]。
1832년 5월, 선거법 개정 법안 심의에서 정부가 패배하자 그레이 백작이 총사퇴를 표명했고, 윌리엄 4세는 웰링턴 공작에게 조각의 대명을 내렸다. 그러나 선거법 개정 반대론자가 총리에 취임하는 것에 대한 여론의 반발은 격렬했고, 부유한 중산층이 중심이 되어 납세 거부나 은행 예금 일제 인출과 같은 형태로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공황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한 잉글랜드 은행 이사가 웰링턴 공작에게 조각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러 올 정도의 사태가 되었다. 결국 웰링턴 공작은 조각을 포기했고, 그레이 백작이 재조각하게 되었다[270]。 이 사건 이후 웰링턴 공작은 "두 번 다시 총리는 하지 않겠다"라고 공언하게 되었다[271]。
결국, 선거법 개정 문제는 선거법 개정 법안에 찬성하는 귀족원 의원을 새롭게 임명해야 한다는 휘그당의 요구를 윌리엄 4세가 마지못해 받아들임으로써, 웰링턴 공작 등 귀족원 토리당이 저항을 포기하고, 1832년 6월에 제1차 선거법 개정이 달성되는 결과가 되었다[272]。
2. 12. 4. 제2차 웰링턴 공작 내각과 필에게의 교체 (1834년-1835년)
1834년 토리당이 정권을 되찾았을 때, 웰링턴은 하원 의원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여 총리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 국왕은 이탈리아에 있던 로버트 필을 마지못해 승인했다. 그리하여 웰링턴은 1834년 11월과 12월 3주 동안 임시 지도자 역할을 하며 총리직과 대부분의 다른 부처의 책임을 맡았다.[275] 임시 내각을 발족시켰다.[276] 이 임시 정권 동안 웰링턴 공작은 국왕 윌리엄 4세와 보수당 간부들에게 필을 추천하며, 필이 수상 및 보수당 당수로서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277]12월에 필이 귀국하자 즉시 수상직을 사임하고, 수상 및 보수당 당수 자리를 필에게 양보했다. 필의 첫 번째 내각(1834년-1835년)에서 웰링턴은 외무 대신이 되었고,[278] 두 번째 내각(1841년-1846년)에서는 무임소 장관(Minister without portfolio (United Kingdom))이자 상원 원내대표(Leader of the House of Lords)였다.
2. 13.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와 침실 시녀 사건 (1837년-1839년)
1837년 6월 20일 윌리엄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인 18세의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했다.[279] 같은 날 열린 빅토리아 여왕의 첫 추밀원 회의에 웰링턴 공작도 참석했는데, 그는 당시의 광경을 "그녀는 육체로 자신의 의자를 채우고, 그 정신으로 방 전체를 채웠다"라고 표현했다.[280]즉위 초의 여왕은 멜버른 자작을 총애했지만, 멜버른 자작은 보수당과 급진파의 이반으로 구심력을 잃어갔고, 1839년 5월 7일에 여왕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이때 멜버른 자작은 보수당 귀족원 원내총무인 웰링턴 공작을 후임 총리로 추천했다.[281]
여왕은 그의 조언에 따라 5월 8일 웰링턴 공작을 불렀지만, 그는 "70이 넘은 저에게는 총리의 중책은 무리입니다. 서민원에 대한 영향력도 없습니다"라고 사퇴하고, 대신 로버트 필에게 총리직을 맡길 것을 건의했다.[282][283] 또한 이때 여왕은 웰링턴 공작에게 "앞으로도 멜버른 경에게 자문해도 괜찮은가"라고 질문했다. 야당 당수가 궁정에서 개인적으로 군주의 상담역이 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웰링턴 공작은 여왕의 마음을 헤아려 이를 승낙했다.[284]
같은 날 오후에 부름을 받은 필은 총리직을 수락하면서도 멜버른 자작이 여왕의 상담역이 되는 것에 반대하여 여왕의 불쾌감을 샀다. 다음 날 필은 휘그당 의원의 아내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침실 시녀를 비롯한 여관 일부를 보수당 의원의 아내로 교체하는 궁정 여관 인사안을 여왕에게 제출했지만, 여왕은 여관 인사는 여왕의 사적인 인사라며 강하게 반대했고, 필과 여왕 사이에서 격렬한 정치 투쟁이 발생했다.[285]
웰링턴 공작은 두 사람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했지만, 서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웰링턴 공작은 필에게 총리직을 사퇴할 것을 권했고, 필은 멜버른 자작이 계속 총리를 맡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286] 웰링턴 공작도 멜버른 자작을 돕기 위해 협력하기로 약속하게 되었다.[287] 이 사건은 침실 시녀 사건이라고 불린다.
2. 14. 만년 (1839년-1852년)
1841년 총선에서 휘그당이 패배하면서 웰링턴은 그해 9월 제2차 필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Minister without portfolio (United Kingdom))으로 입각했다.[289] 1842년에는 육군 참모총장직에 다시 임명되어 1852년 사망할 때까지 역임했다.[293][294]웰링턴은 군 통수권이 국왕에서 육군 대신으로 넘어가 군대가 의회 소속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모든 군제 개혁에 반대했다.[296] 그의 군사적 견해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웰링턴의 후손은 "만년에 육군 총사령관 직무를 맡은 것은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고 평가했다.[295]
웰링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 육군의 문제점은 개선되지 않은 채 크림 전쟁에서 열악함이 드러났다.[297]
2. 15. 사망 (1852년)
1852년 9월 14일 켄트 웰머 성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였다. 11월 18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국장이 거행되었다.[41]그는 죽기 11일 전에 친구에게 "전쟁을 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 즉 언덕 너머에 있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3. 서훈
- Knight Companion of Order of the Bath|바스 훈장 나이트 컴패니언영어 - 1804년 9월 1일[97][328] (1815년 1월 2일, 바스 훈장의 제도 개정[330]에 따라 Knight Grand Cross of Order of the Bath|바스 훈장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영어[331][328])
- 웰링턴의 드루 남작 - 1809년 9월 4일[328][329]
- 탈라베라 및 웰링턴의 웰링턴 자작 - 1809년 9월 4일[328][329]
- 웰링턴 백작 - 1812년 2월[328][329]
- 웰링턴 후작 - 1812년[328][329]
- 드루 후작 - 1814년 5월[328][329]
- 웰링턴 공작 - 1814년 5월[328][329]
- 가터 훈장 기사 - 1813년 3월 4일[152][328][329]
4. 평가
웰링턴 공작은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용맹한 군인이었으며,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보급과 대민 관계를 중시하는 전략을 펼쳤으며, "위대한 장군의 자질은 후퇴가 필요할 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실행하는 용기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301] 웰링턴은 자신의 승리를 과장하지 않았고, 워털루 전투 승리에 대해서도 "나폴레옹이 전술다운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힘든 싸움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질 뻔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302]
그는 영국 신사로서 패자에게 관대했으며, "전쟁이 종결되면 모든 적의를 잊어야 한다... 대영 제국의 정책이 사소한 악감정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305] 부하들을 "술을 마시려고 지원한 인간 쓰레기"라고 부르기도 했지만,[306] 그들의 용맹함은 인정했다.[307] 다만, 웰링턴은 부하 지휘관들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아[308] 워털루 전투에서 직접 여단과 대대급까지 명령을 내렸다.[309]
정치가로서는 시대의 진보적인 이념에 동조하지 못한 둔감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이는 군인 출신으로 하원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312] 그러나 나폴레옹을 격파한 영웅으로서 상원을 비롯한 각 방면에서 널리 인망을 얻었으며,[312] 로버트 필과 같은 보좌역을 통해 보수적이면서도 개혁에 항상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314]
정치 사상 면에서는 국체 수호를 중시했으며,[315] 상원의 권한 약화와[316] 군 통수권이 국왕에게서 육군 장관에게 이양되는 것을 우려했다.[296] 그는 대중의 혁명을 두려워했고, 대중을 혐오했다.[317] 웰링턴은 방대한 양의 서신과 의회 연설집을 남겼다.[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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